3월21일 동경 마라톤을 뛰기 위해 동경행 비행기를 타면서 갑자기 그들의 약속이 궁금해졌다. 아오이와 준세이의 약속… 아오이의 전부였던 남자… 준세이…. 일본 작가 ꡒ에쿠니 가오리ꡓ와 ꡒ츠지 히노나리ꡓ가 2년동안 실제로 연애를 하듯 써 내려간 "냉정과 열정사이" 소설를 읽고 영화를 보았다. 개인적으로 영화보다는 책이 좋았다. 준세이와 아오이의 첫키스 장면에서 나오는 영화 음악이 좋아 핸드폰 컬러링으로 설정해 놓고 듣기도 했다. 첫키스의 추억조차 아련한 28년전,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코스모스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늦 가을 보름 시골 뚝방길에서 첫키스의 추억은 날카롭지도 달콤하지도 않았다. 풋밤처럼 비릿했다.
행운의 숫자인 7번째 풀을 동경마라톤에서 뛴다는 설레임, 나에게 와인을 사랑하게 만든 "신의 물방울"을 쓴 아기타다시가 사는 곳인 일본 동경마라톤을 가겠다고 결심한 지난해 초 나름대로 준비에 들어갔다. 회사가 끝나면 집에 가서 아이 밥을 챙겨야 하니까 주말반 일본어 학원에 등록해서 오전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열공에 들어갔으나 우리클럽 총무일을 맡고 있던 터라 수업을 빠지는 시간이 많았다. 일본에 가서 마라톤도 뛰고 그랑크뤼 와인을 저렴하게 구입하겠다는 의지는 풀코스를 달리 듯 집요했으나 엔고현상으로 와인병만 보고 돌아왔다.
E50930, 비가 온다는 기상예보로 혹시 배번이 젖을 지도 몰라 비닐을 뜯지 않고 배번을 우리클럽 유니폼에 부착했다. 나는 봄이 싫다. 전에 살던 동네의 과일가게 아줌마는 라일락이 피는 봄이 오면 꼭 집을 나갔다가 봄꽃이 사윈 자리에서 푸른 잎이 돋을 즈음에 나타나 과일을 팔기 시작했는데 나도 그 아줌마처럼 심하게 봄을 탄다. 봄이 되면 뒤숭숭한 심란한 마음을 담아 꽁꽁 묶어 여름이 올 때까지 보관했으면 좋을 듯 물품보관용 백이 화려하다. 2009년 3월22일 9시15분 3만5천명이 참석한 동경마라톤을 시작하는 동경 도청 앞은 거대한 발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약간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으나 아직 비는 내리지 않는다. 이른 아침인데도 도로 주변에는 열광하는 시민들로 가득하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었던 서울 2002년 여름의 모습과 흡사하다. 동경 시내의 그 많던 차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달리면서 느낀 동경의 인상은 깨끗했다. 지난주 동아마라톤을 달린 때문일까 누구와 비교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구 왜 길을 막느냐고 싸우는 우리나라의 마라톤 풍경이 머리를 스친다. 5km를 지나자 급수대가 나온다. 자원봉사자들이 입은 주황색 옷에 컵 또한 주황색이다. 이런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쓰는 일본인이 감동스럽다.
42.195km의 긴 무대, 7시간 동안의 인터미션이 없는 뮤지컬 공연이 시작되었다. 동경도청을 출발해서 황거를 달려 10km 피니쉬 지점인 히비야 공원을 지나자 거리 응원인파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군악대의 연주, 오색찬란하게 꾸미고 춤을 추는 시민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겹쳐지는 반환점이 다소 지루한 감이 들었지만 시민들이 나눠주는 쵸코렛, 과자, 젤리사탕 등은 비싼 엔화 때문에 사먹지 못한 간식을 달리면서 공짜로 먹어 뿌듯하다. 피니쉬 지점에 도착했을 때도 배가 고프지 않아 그날 받은 도시락을 먹지 않았다. 처음 12km까지는 6분10초 정도의 페이스로 달렸으나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면서 뛰다 보니 하프에 도착한 시간이 2시간 28분. 비싼 엔화를 주고 왔는데… 즐런하고 싶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다. 굳이 5시간 안에 완주해야 한다는 생각은 출발부터 하지 않았다.
28km 도착 지점인 아사쿠사 관음사에 도착하자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마라톤을 하면서 얻은 교훈 일주일 간격으로 풀을 뜯지 말 것. 동경시민의 응원의 열기는 초지일관 열정적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흐트러짐 없이 ꡒ간바데 구다사이ꡓ를 외친다. 단팥죽을 끓여 나온 사람이 종이컵에 팥죽을 퍼 주면서 찬물을 부어준다. 이방인을 위해 방울토마토, 키위, 비싼 포도까지 갖고 나와 먹으라고 건네주는 그들의 세심한 배려가 가슴으로 느껴진다. 출발 후 달리면서 입간판에 표기되는 거리표시 숫자는 기쁨과 비례하고, 35km 이후 줄어드는 거리표시 숫자는 희망과 비례한다. 여태까지 달려온 길이 평탄했지만 35km지점은 언덕이다. 동마에서의 잠실대교 지점과 흡사하다.
피니쉬 지점인 오다이바 빅 사이트에 도착했을 때, 완주자 한명 한명에게 정성스럽게 메달을 걸어주는 일본인의 모습이 정겹다. 오늘 달린 모두를 주인공으로 대접하는 모습이 기쁘다. 시간은 걸리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5시간21분 동안의 길과의 결투에서 얻은 승리...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인정해 주고 있다. 오늘 동경에서 만난 63토끼마라톤 친구인 태제와 영수, 달리기의 달인 김천시청 오숙정님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동반주를 하면서 먹을 것을 챙겨주고, 사진을 찍어준 태제가 눈물겹도록 고맙다. 오늘 동경마라톤을 응원 나온 인원이 136만명, 완주율이 97%라니 놀랍다.
지난해 12월,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현관 문을 열어주고, 방학때 인스턴트 음식을 먹이지 않기 위해, 그동안 다닌 회사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박스 한 개에 포장했다. 동경마라톤은 그동안 열심히 일한 나에게 내가 준 선물이었다. 꿈의 동경마라톤에서 냉정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침묵의 길 위를 열정적으로 달려, 약속을 지켜서 기뻤다.
인생은 다른 곳에서 시작됐지만 같은 장소에서 끝날 것이라는 아오이와 준세이의 약속을 믿으면서….
또 이것을 실행한 이성에게 박수를~
사탕 하나에도 물컵 하나에도
많은것을 담아 내는 감성에도 축하를~
마라톤이 쉼없이 이어지는 뮤지컬로 느껴지셨다는 감상이
또 다른 감성으로 다가 오네요.
세파에 시달려도 식지 않는 열정처럼......
'필화님 화이팅~'
PS. 열심히 준비하신 일본어 언제 보여주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