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여, 건배하자,

  추락하는 모든 것들과

  꽃피는 모든 것들을 위해 건배.

  어제를 위해 그리고 오늘을 위해 건배."


새벽 6시 어둠이 가시지 않은 광화문 교보 빌딩에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대형 현수막에 걸려있다. 사랑과 마라톤의 공통점은 불타오르는 열정이다. 광화문 주변은 시골 5일장이 선 것처럼 전국에서 몰려든 마라토너들의 열정으로 넘친다. 오늘 서울국제마라톤에 출전하는 이만오천 명의 참가자들은 전쟁에 참전하는 용사처럼 씩씩하고 숙연한 모습으로, 본인의 출발 그룹에서 세종로의 수호신인 이순신 장군 동상을 향해 42.195Km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그들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2년째 접어든  짧은 마라톤 경력이지만 나의 마라톤 사랑은 심오하다. 2007년 가을에 첫 풀코스를 완주했으며, 첫풀의 진한 감동을 간직하고, 오늘 도전 2번째 풀코스를 달린다. 한달 동안 감기와의 집요한 동거로 인해 충분한 연습을 하지 못해서 걱정이 앞선다. 오늘 완주 목표 시간 4시간 50분, 봄꽃이 피어나듯 사람들 사이로 번져 들어간다.


불타 버린 모습을 감추기 위해 치마를 두른 숭례문 앞을 달리고 있다. 양녕대군이 일필휘지로 써내려 간 현판이 불길 속에서 살려달라고 소리친다. 한 사람의 빗나간 욕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준다. 5km 지점인 을지로 3가에서 31분 신호음이 울린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도심은 고요 속에 묻혀 있다. 오래전에 본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휘파람 소리에 맞춰 행진하는 군화 발자국 소리가 침묵을 깨고 쿵…쿵…쿵…. 청계천을 따라 메아리친다. 1시간 3분으로 10km 지점을 통과한다.

 

종로 거리에 들어서자 오밀조밀한 상가들이 정겹다. 졸음에서 깨지 않은 화분속의 봄꽃들이 "어서 달려"라고 외친다. 서울 도심 한복판을 짧은 팬츠만 입고 내 마음대로 달릴 수 있음은 나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선택받은 행운이다. 보물1호 흥인지문 앞을 가로 질러 달린다. 흥인지문은 국보를 태워먹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달리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흥인지문의 침묵 속에 다시 발소리만 들린다. 15km를 1시간 36분으로 통과한다. 훈련 부족에서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자원봉사자에게 맨소래담을 얻어 허리에 문지른다. 약발이 신통하다. 뼈속깊이 스며들어 화한 기운이 뻗쳐 힘이 솟는다.


2시간 10분으로 20km의 안내 표지판을 맞이한다. 급수대가 보인다. 이쯤에서 팬츠 뒷주머니에 고이 간직한 파워젤 한 개를 꺼내 먹는다. 뭉쿨뭉쿨한 파워젤의 촉감이 뱀허리처럼 부드럽다. 절반의 성공에 가슴이 뭉쿨하다. 파워젤을 먹은 후 물을 마신다. 첫 만남을 마지막으로 주로에 버려지는 종이컵. 마신 그를 짓밟고 다시 달리는 이중성. 일회용의 비애가 안타깝다. 신답지하도로 들어서자 달리는 사람들은 포효한다.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아낀 말들을 마구 쏟아 땅속에 밀봉하고 지하도를 빠져 나와 달린다

 

군자교를 지나자 어린이 대공원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도심은 이제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시민들의 뜨거운 응원의 열기가 힘을 준다. 한 번의 만남도 없었지만 손을 내밀어 하이파이브를 해 준다. 이건 마라톤대회가 아니라 시민과 함께하는 축제이다. 약발이 떨어졌는지 허리가 아프다. 레이스패트롤의 손에 들려있는 맨소래담이 보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아줌마의 용감성 허리를 들이민다. 총각은 내 허리에 정성스럽게 맨소래담을 발라주면서 완주하라는 용기까지 덧 발라준다.


30km에 진입한 시간이 3시간25분 아직 희망의 끈을 잡고 있다. 팬츠 뒷주머니에 있는 두 개의 파워젤이 부담스럽다. 버릴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2배의 힘을 기대하면서 2개의 파워젤을 한꺼번에 빨아먹는 생존본능, 나의 식욕이 놀랍다. 아픈 허리를 돌리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4시간 40분 페메를 따라 잡는다. 엄지발가락이 운동화 앞쪽으로 쏠려 발가락이 아프다. 운동화를 벗어버리고 싶다. 서울 숲을 통과해서 자양사거리를 달린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 잠실대교가 눈앞에 나타난다. 4시간3분으로 35km를 마무리 한다. 부여잡고 있는 희망의 끈이 올이 풀리기 시작한다.


악마의 8km. 마음은 벌써 종합운동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데 발이 무겁다. 잠실대교는 소풍 나온 사람들의 쉼터 같다. 다리 난간을 부여잡고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 달릴 것인가 회송용 차를 탈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누군가가 빨아먹는 아이스크림을 건내 준다. 희망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달린다. 4시간 40분의 페메가 나를 앞지른다. 내 곁에 있어 달라고 소리쳐도 야속한 풍선은 메롱을 외치면서 달아난다. 석촌 호수 사거리를 지나자 샤롯데 극장 앞에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Notre Dame de Paris)"의 대형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뮤지컬 배우 "박은태"가 "대성당의 시대"를 소름끼치게 부른다.


 "아름다운 도시 서울

  때는 2008년 3월 16일 서울국제마라톤

  모두 함께  달리는 축제의 한마당

  우린 무명의 마라토너

  제각각의 페이스로

  오늘 마라톤을 하지

  훗날의 당신에게

  오늘 달린 이야기를 들려주려해

  주로(走路)에 두 발로 오늘의 이야기를 새기지."


나의 사랑 종합운동장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누군가가 외치는"김미자 힘내라"가 꿈결처럼 아득하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마라톤클럽 회원들의 응원소리에 힘을 얻어 비몽사몽으로 운동장 트랙을 밟는다. 4시간 57분 59초!  아슬아슬하게 골인한다.

어제가 아버지 기일이었는데 오늘 대회 때문에 시골에 내려가지 못했다. 어린시절  기억속의 아버지는 차가운 골방에서 젖은 짚을 갈라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른침을 뱉어가면서 마라톤처럼 긴 여정의 새끼를 꼬고 계셨다. 긴 겨울밤 가마니에 희망을 수놓으며 메밀묵으로 배고픔을 달래주던 그리운 아버지께 완주 메달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