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마후기) 2008년 서울을 보다

 

3, 만물이 소생하는 새로운 의미에서의 1년의 시작입니다.  엄동과 설한, 삭풍에 움츠린 몸과 마음을 생명 머금은 3월의 바람과 햇살에 마음껏 드러냅니다.  이만오천이라 했던가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서울의 한복판을 달리는 것으로 봄을 맞고자 말입니다. 

 

두번째 풀코스, 첫번째 보다 오히려 더 두렵습니다.  지난 가을의 첫경험에서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그까짓 하며 무모하게 달려든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거리의 만만치 않음을 경험한 바 있는 지금으로서는 솔직히 두렵습니다.  기나긴 여정의 외로움이 두렵고, 육체적 고통의 정점에서 포기의 유혹을 한사코 떨쳐내던 기억이 두렵고,  37km 이후 움직여도 움직여도 앞으로 나아가질 않던 그 황당했던 경험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다시 여기 섰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하던 순간의 벅찬 감격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며칠을 두고 되새김질했던, 풀코스 완주라는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러운 듯 신기한 듯 바라보던 주변 사람들의 과찬도 작용했을 것이며, 입만 열면 마라톤의 효용을 설파했던 얼치기 달림이로서의 묘한 책임감도 한몫 했을 것입니다. 

 

비슷한 기록의 주자들과 함께 천천히 출발합니다.  세칭 서브4에 대한 욕심을 내어봅니다만 능력과 노력 이상의 욕심이 낳는 해약을 잘 알기에 이내 접고, 마지막까지 페이스를 잘 유지하여 즐겁게 달리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합니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방법이 있다면 천천히 달리는 수 밖에요. 

 

천천히 달리는 대신에 도심을 지그재그로 누빌 수 있는 이 합법적인 기회에 서울이라는 도시를 찬찬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천만 인구의 삶의 터전인 거대도시의 겉모습을 관찰하려 합니다이곳에서 25년을 살면서도 무딘 감성으로 인해 제대로 보지 못했던 서울사람들의 체취와 색깔을 느끼려고 합니다.  500년 도읍지로서의 구석구석 배여 있을 영광과 오욕의 역사적 자취를 살피려고 합니다. 너무 거창했습니까?

 

귀에 익은 사회자의 힘찬 출발 신호와 함께 충무공 동상 아래를 통과합니다.  세종로에 충무공 동상? 세종로, 충무로, 을지로의 주요 도로에 이름을 빌려준 영웅들의 동상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은 나만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막 둘러친 불타버린 남대문이 나타납니다.  국보1!  국보라는 권위와 1호라는 상징성으로 인하여 한국문화재의 대표로 자리매김해왔던 만큼 그 국보1호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지금, 이 허망함이란 이루다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서울국제마라톤 홍보자료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던 남대문과 함께 남대문을 에워싸고 도는 주자들의 물결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물이던 그것을 소유할 자격을 가진 이에게 돌아갈 때 그 가치가 온전히 유지되고 또 발휘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우리 국민이 과연 국보1호를 소유할 자격이 있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가치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런지요.  남대문의 소실은 아마도 경제적 성공이라는 속물적 키워드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의 천박한 역사 이해와 문화적 소양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아닌가 합니다. 

 

과거처럼 남대문을 한 바퀴 돌지 못하고 도망치듯 을지로 방향으로 U턴하여 달립니다.  한무리의 주자들을 이끌고 있는 4시간 페메를 따라 붙습니다.  하나--하나-둘 구령과 호루라기 소리가 경쾌합니다. 중간 중간 달리는 요령과 호흡법, 그리고 코스 운영에 관한 친절한 설명을 곁들입니다.  따르는 사람 모두들 좋은 안내자를 만나서 서브4를 할 것 같다는 분위기로 자신감이 넘칩니다.  좋은 지도자와 지도자에 대한 믿음이 결국 사회구성원들을 행복한 미래로 안내할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페메를 보며 떠올립니다.

 

을지로5가에서 다시 U턴하고 5km 급수대에서 봉사하는 학생들이 건네는 물 2잔 마시고 청계천으로 꺾어 듭니다. 시원스럽게 흐르는 물줄기를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달리는 위치에서는 청계천의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청계천! 최근 몇 년간 정치적 이슈의 중심에 있었고, 결국 지금의 대통령을 만든 1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저에게도 청계천은 3개의 사진으로 인해 마음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중학시절 친구의 책장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라이프지에 실린 60년대 청계천 사진입니다. 청계천의 아침 풍경으로 3층쯤 되는 판자집이 늘어서 있고, 층층마다 사람들이 머리를 내밀고 깡통 두레박으로 퍼 올린 청계천 물로 양치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 동네 사람들은 청계천 복개 계획과 함께 경기도 광주 어디로 퍼 날라져 더욱 고단한 삶을 살았다는 뒷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그 사진은 슬픔과 연민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두번째는 저희 또래의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겠습니다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삼일빌딩과 다층의 청계고가도로를 포착한 사진입니다.  아마도 사진은 70년대 조국근대화의 기치 아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의 자랑스런 모습을 보여 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시골 바닷가의 코흘리개였던 저도 사진을 보면서 나날이 발전하는이라는 수식어가 꼭 따라 붙던 서울이라는 미지의 도시를 동경했었습니다. 

 

마지막은 복원된 청계천의 사진입니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흐르는 제법 깊은 물줄기를 상상했던 저로서는 높은 콘크리트 둑과 펌프로 강제 급수되었다는 얕은 물줄기가 다소 실망스럽긴 했습니다만 자연을 완전히 복원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교훈과 함께 빌딩 숲을 적시는 물줄기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세 개의 사진이 보여주듯 청계천은 절대빈곤, 개발, 복원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짧은 현대사와 이 시대 우리의 생각과 의식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어느덧 페메의 호루라기 소리를 뒤로하고 자꾸 빨라지려던 발걸음을 후반부의 고난 여정을 생각하며 진정시킵니다.  그런데 앗! 저것이 무슨 풍경입니까?  소대 규모의 남성 달림이들이 건축공사장의 울타리를 마주보고 서서 생리현상을 해소하고 있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생리 신호가 왔을 때의 당혹감을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달린다는 것이 모든 도덕과 양식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고 하여 꾹 참고 달리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리일 것입니다.  주로 초반에 나타나는 현상인 만큼 출발지점외에 초반 주로에도 간이화장실을 배치하고 안내책자을 통해 홍보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청계천의 마지막 지점을 돌아 다시 서쪽으로 향하니 빌딩 그늘에 가리웠던 3월의 따스한 햇살이 반깁니다.  저만치 동호회원 한 분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어느 모임에서는 여러 종류의 재주꾼이 있습니다만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기억력 그리고 감칠맛 나는 글솜씨로 동호회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분입니다.  옆으로 붙어서 날씨와 황사, 오늘의 컨디션 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지루해지는 도심 주행의 건조함을 달랩니다. 

 

15km 지점을 조금 지난 지점인 것 같습니다.  청계천과 종로 사이에 갇힌 승용차의 운전자가 도로통제중인 경찰관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침 일찍 도심으로 들어왔다 갇힌 모양입니다.  머릿속으로 우회도로를 그려봅니다만 종로와 청계천을 잘라버린 상황에서 답이 잘 나오질 않습니다.  집단의 필요와 개인의 권리의 충돌!  우리 사회가 항상 부딪히고 있는 문제입니다만 뚜렷한 해법은 없어 보입니다.  공동체 의식의 확대, 사전 충분한 홍보와 보완책의 준비, 개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 등등, 판에 박힌 말들을 떠올려 보지만 현실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다만 코스를 설계할 때 통행이 불가능한 사각 지대가 없도록 하는 배려와 도로 통제 담당자들이 자신의 위치에서의 우회도로에 대한 정보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 정도를 가져봅니다. 

 

종로로 접어듭니다.  종로2가 종로서점이 있던 자리를 지납니다.  20여년전 학창시절 당시 여느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종로와 명동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종로서적은 대표적인 약속 장소였습니다.  종로서점뿐만 아니라 대도시의 대형 서점은 편리한 교통과 기다리는 지루함을 달래줄 결정적 도구인 책으로 인해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곤 했습니다.  온라인서점의 등장이 원인이 되었겠습니다만 오프라인 서점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지식과 교양이 덩달아 줄어드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듭니다. 

 

동대문 즉 흥인지문을 지납니다.  남대문과 동대문의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국보1호와 보물1호라고 배웠을 뿐입니다.  내용과 가치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없이 이름과 형식만을 무슨 지식인양 외우고 있어 부끄럽습니다.  한편 동대문은 보물이라는 국보보다 한단계 절하된 평가로 인해 지금 이 자리에 제 모습을 온전히 보전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봅니다.  굳이 동대문과 남대문을 비교하지 않더라도, 훌륭한 평가를 받고 높은 지위에 올라간다는 것이 결코 생명과 가치의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례를 많은 곳에서 봅니다.  코끼리는 상아로 인해, 밍크는 가죽으로 인해 멸종의 위기에 있으며, 에베레스트는 그 높이로 인해 인간의 손때를 타고, 체첸과 티벳은 부존 자원의 가치로 인해 더더욱 독립이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서 평범함이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가까스로 4대문을 벗어납니다.  왔다갔다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답답함에서 벗어나 목적지를 향해 곧장 간다는 생각이 발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신설동오거리를 지나 하프지점에 가까워 지자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응원의 목소리도 높아집니다.  그리고 몸을 풀거나 쉬어가는 주자들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km 540초를 유지해 왔습니다만 날씨 덕분이지 응원 덕분인지 컨디션이 좋습니다.  속도를 조금 높여볼까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만 35km 이후의 참담했던 작년의 경험을 떠올리며 참기로 합니다. 

 

신답지하차도에 들어서자 함성이 터져 나옵니다.  막힌 공간에서 증폭되는 목소리의 울림을 통해 주자들은 힘을 얻는 모양입니다. 

 

시각장애인 동반주 한쌍이 달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짧은 끈으로 묶여 있습니다.  묶인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이 되고 의지가 될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에게, 어떤 이는 부모에게, 어떤 이는 자식에게, 또 어떤 이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목적에, 어떤 이는 물질적 성공이라는 목표에, 가끔씩 어떤 이는 인류의 행복이라는 가치에, 모두모두 보이지 않는 끈을 묶고 그 끈에 의지하여 삶의 마라톤을 달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25km 지점에 이르자 풍물패의 신나는 사물놀이 응원이 지친 주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꽹과리 소리에 맞춰 어깨춤을 한 번 추어봅니다. 사물놀이패와 눈길이 마주치며 서로 웃음을 건넵니다.  주자들이 응원으로부터 힘을 얻지만 응원을 보내는 이들도 주자들의 반응으로 힘을 얻을 것입니다.  응원의 힘으로 달리고 반응의 힘으로 응원합니다.

 

어린이대공원을 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도에서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악대의 힘찬 연주소리도 들려옵니다.  일련의 학생들이 손을 내밀고 주자들과 하이화이브를 나눕니다.  부딪히는 손바닥으로 에너지가 전달됨을 느낍니다. 

 

성동교사거리를 좌회전하여 30km 급수대에서 파워젤, 바나나, , 스포츠음료로 빵빵하게 배를 채웁니다.  이젠 조금 속도를 내어도 될 것 같습니다.  Km 520초로 페이스를 올립니다.  자양사거리까지 많은 주자들을 앞질러 신나게 달립니다. 

 

잠실대교가 보입니다.  동아마라톤은 잠실대교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누누히 들었습니다만 웬일인지 아직 힘이 남아 있습니다.  힘차게 잠실대교의 오르막을 올라 물과 음료수 보충하고 발길을 재촉합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실대교를 지납니다.  한강은 온화하게 자신에게 들어온 3월의 태양의 빛을 내뱉고 있습니다.  멀리 관악산의 늠름한 자태도 눈에 들어옵니다. 

 

서울은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안고 있는 도시입니다.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관악산의 기묘하고 웅장한 산자락을 끼고, 생명의 원천으로서 한강의 풍성한 물줄기를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산이 있어 메마르기 쉬운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시원한 그늘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서울이 진정 행복한 도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서울을 자연의 수준에 걸맞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꾸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울의 인공물 중에서 이곳을 찾는 외지인에게 자신 있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강을 따라 늘어선 평당 몇천만원이 넘는다는 강남의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강남의 높은 빌딩들도 보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 저 수많은 아파트와 건물들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가치를 높이고 있는지 정녕 모르겠습니다. 

 

잠실대교의 남단에 이르자 주자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만큼, 각종 동호회와 단체 회원들의 응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주자들의 힘을 북돋우기 위해 물량 공세도 많아집니다.  남은 거리를 위한 든든한 에너지가 되리라 믿으며 주는 족족 받아서 차곡차곡 뱃속을 채웁니다. 

 

석촌호수를 끼고 돌며 이젠 남은 에너지를 모두 쏟아야 할 때라 느낍니다.  Km 510초로 페이스를 높입니다.  다소 호흡이 거칠어집니다만 끝까지 달릴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이 듭니다.  백제고분로를 힘차게 달립니다.  잠실운동장 눈에 들어옵니다.  운동장 입구에서 동호회 회원이 건네주는 깃발을 받아 들고 신나게 트랙을 돌아 결승선을 통과합니다. 

 

예상하고 기대했던 것 보다 좋은 페이스의 즐거운 달리기였습니다.  좋은 날씨 덕분인지, 주로 내내 계속된 응원의 힘 덕분인지, 어느 대회보다 길고 풍성하던 자원봉사자들의 지원 덕분이지 구분이 되질 않습니다.  욕심내지 않았던 초반 페이스 덕분일지도 모르겠고, 늘 남편의 마라톤 사랑에 불평하던 집사람이 준비해 준 찹쌀떡과 찹쌀순대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불편함을 참고 도심의 마라톤 대회를 축제로 승화해낸 대다수 서울 사람들의 인내와 지원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그 서울 사람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