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마라톤클럽 만남의 광장에 올린 정준호님의 서울울트라마라톤 완주 후기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퍼 왔습니다.


                            높이 나는 새는 뼈를 가볍게 합니다                         

높이 나는 새는 뼈를 가볍게 합니다
- 서울울트라마라톤 후기(진중한 버전)
               
1. 첫눈, 잊혀진 추억처럼
어젯밤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첫눈 치고는 제법 소담한 눈발이 날렸습니다. 바람에 날리던 눈발은 서늘한 대지에 쌓이고 또 쌓여 은빛을 반사하며 결빙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뿐. 식어 버린 나의 감성은 첫눈 내린 '건조한 사실'에 대한 묘사이외에는 별다른 '감정의 상승'을 이끌어 내지 못합니다. 라라의 테마도,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발자국도,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님 돌아오라던 느릿느릿한 노래자락도 이제는 잊혀진 추억처럼 박제된 야생의 짐승이 돼 버린 지 오래 입니다.
              
날씨 차갑습니다. 서울울트라마라톤대회가 열렸던 지난 일요일 새벽은 어쩌면 한기의 도래를 알리는 겨울의 서막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레 찾아 온 칼날같은 찬바람은 늦가을의 온기에 취한 나의 폐부를 습격합니다. 낼 모레가 소설(小雪), 추워질 때가 된 것을 사람보다 계절이 먼저 알고 있음을 알겠습니다.
               
한방에 어울려 잠자던 더불어숲 회원들과 평화의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어느 겨울 계수님에게 써 보낸 쇠귀 선생님의 편지 한 장을 생각했습니다.
           
            
2. 길, 돌아오기 위해 존재하는 것
우리 일행은 약간의 여유를 부려도 좋은 그런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65킬로미터 지점에서 갈아입을 옷가지를 맡긴 다음 주먹김밥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응원하러 오신 숯내 김 회장님과 반갑게 조우하는 찰나의 시간을 가져 봅니다. 이제 출발 시간이 다가옵니다. 비닐 옷에 빈약한 체온을 맡긴 채 출발선에 섭니다. 이 차가운 새벽에 먼 길 달려 가려고 서 있는 건각들의 수 많은 표정들이 교차합니다.
            
출발 신호와 함께 건각들이 달려갑니다. 나는 늘 그렇듯 끝 자락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떼기 시작합니다. 소설가 이외수 선생의 이야기처럼 '길이란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 존재하는 것'. 해지는 저녁이면 먼 길을 돌아 다시 여기로 올 겁니다. 가벼운 발걸음 대신 힘겨운 몸짓을 한채 말입니다.
           
           
3. 결별, 새로움의 조건
올림픽공원을 지나 한강으로 들어섭니다. 서늘한 강바람이 불어옵니다. 저 멀리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서울의 각진 건물에 갇혀 포로가 됐다가 야음을 틈타 한강으로 탈출한 바람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아무튼 찬바람은 온몸의 열기를 끌어 내리며 마음 바쁜 주자들의 발걸음을 더디게 합니다.
            
발걸음을 돌려 돌아간다면 편안하련만 저마다 가야할 길을 향해 온 몸으로 찬 바람을 맞으면서 달려 갑니다. '목적하는 항구의 방향을 모르면 모든 바람은 역풍'이라는 시모어의 글이 생각납니다. 어쩌면 칼날같은 역풍에 맞서야 하는 이유, 갈대의 소리 대신 비닐 옷의 소음을 벗해야 하는 이유를 아는 지금의 내가 행복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방향, 삶의 지향을 모른 채 살아가는 수 많은 날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찬 바람, 거센 바람은 나무에 힘겹게 붙어 있던 나뭇잎을 떨굽니다. 울창한 녹음(錄音)대신 서늘한 나목(裸木)으로 선 나무들을 봅니다. 나는 지금 나뭇잎 떨군 나목처럼 허위의 의상을 벗고, 정직한 한 사람으로 서는 인고의 시간을 탐닉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역풍을 견디며 발걸음 내 딛지 않는 한 결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 갈 수 없는 마라톤의 원시적인 정직함을 몸으로 배우는 시간입니다.
             
           
'새해가 겨울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낡은 것으로부터의 결별이 새로움의 한 조건이고 보면
칼날 같은 추위가 낡은 것들을 가차없이 잘라 버리는 겨울의 한복판에
정월 초하루가 자리잡고 있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나는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잊으며,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 신영복 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겨울은 새로움을 발견하는 계절입니다. 아니 새로움을 희망하는 계절입니다. 새해가 되면 이유없이 새로운 희망에 들뜨는 것도 어쩌면 '낡은 것으로부터의 결별'을 실천하려는 다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칼날 같은 새벽 한강의 바람을 맞으면서 어떤 낡은 것들을 잘라 버려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비록 작심삼일에 그치고 또 미완성으로 결론지어진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잘라 버리려는 새로움을 향한 결별의 실행은 이미 큼직한 이룸과 해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4. 마라톤, 혼자 달리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양재천과 안양천은 한강의 거센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은총의 땅이었습니다. 좁은 주로를 오가며 응원을 나누고 힘을 보태는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양재천을 돌아 나올 무렵부터 아파트 숲 꼭대기에 햇살이 걸리기 시작합니다. 태양의 온기가 한없이 반가운 아침입니다. 두 겹으로 겹쳐 입은 비닐 옷 한 개를 벗어 던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달려 갑니다.
                
그러나 양재천을 벗어나면서 만난 한강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홑겹 비닐 속에 맺힌 땀 방울은 어느새 얼음방울이 되었습니다. 한 겹 벗어 던진 것을 후회해 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제는 비닐 옷의 보온 대신 몸의 열기로 나를 데워야 합니다.
            
어느덧 여의도에 도착했습니다. 당산철교 아래에서 자원봉사하고 계시는 엽기천사님의 비법수 한잔에 시름을 달래 봅니다. 내가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 나를 달리게 했던 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엽기천사님의 비법수, 김회장님의 박카스를 비롯해서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나눠 주신 맛있는 음료와 간식 그리고 힘찬 응원 덕분이었습니다. 마라톤은 결코 혼자 달리는 스포츠가 아님을 배우는 하루였습니다. 내 발이 되어주고, 내 힘이 되어주고, 내 용기가 되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5. 전복 죽, 냉큼 한 그릇을 비우고
안양천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깁니다. 53킬로미터 지점에 있다는 1차 관문을 만나러 갑니다. 우거진 갈대 숲이 바람에 일렁이며 흥겨운 파도타기를 합니다. 한강 바람을 피한 안양천에는 포근함이 가득합니다. 참 기분 좋은 시간입니다. 1차 관문을 지나 안양천 반환점을 돌아 나왔습니다. 이제 5킬로미터만 더 가면 마지막 반환점입니다. 등뒤에서 바람이 불어오니 발만 떼면 된다는 어떤 분의 익살에서 미소가 피어납니다.             
             
65킬로미터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길. 여전히 거칠고 서늘한 강바람이 가득합니다. 저 멀리 반환점이 보입니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개선문같은 서울마라톤 아치가 보입니다. 붉은 카펫을 밟으며 반환점을 통과했습니다. 이제 전복죽 한 그릇에 시름을 달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잠시 쉬어 가도 좋은 시간입니다.
          
쭈꾸미 모자로 유명한 사장님이 직접 만든 전복 죽 한 그릇을 냉큼 비웠습니다. 여전히 허기가 가시지 않습니다. 빈 그릇을 가지고 가서 양해를 구하고 한 그릇을 더 비웠습니다. 제 뒤로 도착하신 분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혹시 저로 인해 전복 죽이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탈의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 입으려고 보따리를 펼쳐 보니 긴팔 티셔츠 하나와 반바지 하나, 수건 하나가 달랑 들어 있습니다. 집에서 미리 꾸려 온 까닭에 추운 날씨를 조금도 감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마른 옷 하나라도 챙겨 온 것이 다행입니다. 땀으로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마른 옷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6. 높이 나는 새, 뼈를 가볍게 합니다
잠깐의 달콤한 휴식을 즐긴 후 다시 출발합니다. 이제는 떠나 온 곳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아니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태양은 열기를 잃어가며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햇살은 아직 하늘에 있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벌써 해 저문 저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추위에 떨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 갑니다. 해지고 지치면 더 큰 추위와 싸워야 하는 길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기록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달린 까닭에 지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난해에도 '높이 나는 새는 뼈를 가볍게 합니다'라는 쇠귀 선생님의 글을 생각하면서 즐겁게 완주했었습니다. 올해도 나는 멀리 그리고 오래 달리기 위해 마음을 가볍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올림픽공원이 저기 보입니다. 4킬로미터, 3킬로미터, 2킬로미터……. 나는 평화의 문을 향해 처음 출발할 때보다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 갑니다. 평화의 문을 코 앞에 두고 지리산님을 발견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불러보고 싶지만, 행여나 발걸음 더디게 할 까 조심조심 뒤 따라 갑니다. 지리산님의 뒤에서 완주 축하의 박수를 보낸 후 나도 두 팔을 벌린 채 골인점을 향해 달려 갑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집니다. 셔터 소리가 들립니다. 어깨위에 커다란 수건을 두릅니다. 이제 250리 마라톤여행을 마쳤습니다.
                   
                
7. 우정, 글벗 그리고 길벗
칩을 반납하고 식권을 받아 식당에 들어가니 먼저 온 일행이 반갑게 인사합니다. 황매산 도사는 나와 동반주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바람에 많은 아쉬움이 남았을 테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나를 위해 밥을 타다 주는 우정을 발휘했습니다. 글벗 그리고 길벗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더불어숲 회원들과 더불어 인근 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따끈한 국물을 안주 삼아 맥주에 소주 한 잔 섞어 술을 마시며 얼어붙은 속을 달래 봅니다. 멀고 길었던 여행 후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불암산 자락에 도착하니 밤 아홉시. 토요일 저녁에 집 나간 남자가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샤워하고 누우니 잠이 절로 쏟아집니다. 양 한 마리 셀 틈도 없이 곯아 떨어졌습니다. 밤새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밤새 꿈속에서 새로 펼쳐질 마라톤여행을 기다리며 평화의 문을 서성였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내가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 추운 날씨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대회 치르신 서울마라톤클럽 모든 분들과 자원봉사자님들의 엄청난 수고에 감사합니다. 극한 상황을 이겨내고 완주하신 분들과 또 완주에 도전하셨던 모든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2007.11.18.
              
글벗과 길벗 그리고 -
신선한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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