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마라톤 홈피에서 김미자님 후기 퍼 왔습니다.)


짧은 동행, 긴 이야기 속으로

중앙서울마라톤이 열리는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색색의 물감을 풀어 놓은 듯 가을 풍광이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이른 시간인데도 주차장을 가득 메운 관광버스의 행렬, 풀코스 출발 준비를 재촉하는 아나운서의 바쁜 멘트, 스트레칭을 하면서 힘을 외치는 마라톤 클럽의 활기 넘치는 구호로 시끌벅적하다. 배번호를 정성스럽게 앞가슴에 부착하고 칩을 운동화 끈에 엇갈리게 끼워서 매듭을 묶은 후 내가 활동하고 있는 마라톤 클럽 총무의 도움을 받아서 중앙서울마라톤 티셔츠 색상인 하늘색에 맞춰 무릎과 종아리에 테이핑을 했다. 모자와 장갑까지 티셔츠 색상인 하늘색으로 준비한 나만의 패션 감각에 만족한다.

오늘은 내 생애 첫 풀코스를 달리는 영광스러운 날이다. 달리기에 대한 나의 추억은 만국기가 휘날리는 초등학교 운동회 날 거의 꼴찌를 맡아 놓고 달렸던 기억과 대입준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운동장을 다섯 바퀴 정도 돌아야 했던 오래달리기가 전부이다. 마라톤 경력 또한 작년 이 맘 때 중앙서울마라톤 10Km를 1시간19분48초로 편안하게 달렸던 것이 전부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오늘 풀코스를 달린다. 42.195Km의 긴 주로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두 발로 시를 쓰 듯…. 중앙서울마라톤 풀코스를 5시간 안에 완주하겠다고 결심하면서 스타트 지점으로 이동한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드디어 출발…. 오전 8시 풀코스 출발 신호가 들린다. 도심 한복판을 막고 달리는 메이저 대회인 중앙서울마라톤이라는 한편의 뮤지컬이 막이 오르고 있는 순간이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다. 평소 연습한대로 1Km에 6분 30초로 천천히 달려 나간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출렁거리는 물결 속에서 점하나로 찍혀 2007년 가을을 보낼 수 있음은 행복한 일이다. 올림픽 공원이 단풍으로 불타고 있다. 움직임이 없는 나무는 기다림에 지친 초록을 복분자 술빛으로 물들인 가장 화사한 옷을 입혀 결별을 선언한다. 나무의 잔인한 배려가 마음을 적신다. 붉게 떨어진 나뭇잎을 모아 체에 거르면 복분자 술이 한가득 받아질 것 같다. 여수 대교 주변의 나무들은 형형색색의 단풍잎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내 품으로 달려오라고 유혹한다. 10Km를 1시간5분45초로 단풍속으로 달린다.

내 아이 생각만 하면 양잿물을 마신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타들어 간다. 작년 12월 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아이는 기말고사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목이 심하게 부어서 동네 소아과에 갔는데 의사는 고개를 젓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소견서를 써 주었다. 온갖 사연으로 응급실에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긴 기다림 속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입원을 시켰다. 일주일을 병명도 모르는 상태에서 소염제만 투여 받았고, 병원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조직검사 결과 불행 중 다행으로 양성으로 판명되어 수술 날짜를 잡고 수술에 들어갔다.

헉! 아직 갈 길이 먼데… 20Km도 지나지 않은 세곡동 사거리 부근에서 벌써 반환점을 돌아 달려오고 있는 에스코트 차량들이 텅 빈 아스팔트 위를 질주하고 있다. 몇 미터 뒤로 초원의 얼룩말처럼 달려오고 있는 엘리트 선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건강미 넘치는 젊은 선수들을 구경하면서 달리는 것도 풀코스의 매력. 삼삼오오 달려오는 선두 그룹이 케냐 선수 같다. 작년 대회 때 2시간8분13초로 우승한 제이슨 음보테 선수는 상금으로 케냐에 돌아가 민박집을 차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2시간 동안 온몸을 불태워서 탄 상금으로 이룰 수 있는 꿈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저 멀리 한국 선수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엘리트 선수들은 상행선 종합운동장으로, 나는 하행선 반환점을 향해 여수대교 사거리를 오른쪽으로 꺾어 달린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반환점이니까 힘을 내라고 누군가가 외친다. 급수대가 보인다. 생존을 위해 파워젤을 먹은 후, 다시 반환점을 향해 달린다. 아무리 달려도 보일 듯…보일 듯…보이지 않는 반환점! 주로에서 경쾌한 음악으로 분위기를 돋우는 음악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다시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급수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분들의 "힘 내세요, 조금만 더 가면 반환점입니다." 라는 말이 다리에 힘을 준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반환점이 보인다. 2시간42분28초로 반환점에 두발을 찍는다.

수술 후 아이는 점차로 회복이 되어 가는 듯 했지만, 반전은 영화나 드라마에만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아이가 수술을 마친 후, 외과 의사는 아이를 방사선과로 가보라고 했다. 방사선과는 암환자가 가는 곳인데 왜 방사선과로 가라고 하는지 물어보지도 못한 채… 아이를 데리고 방사선과로 갔다. 소아암 전문 의사는 아이의 상태를 10대에서는 거의 발병률이 없는 특이한 경우이며 완치된 통계자료가 없어서 10년 동안 아이의 앞날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말을 간단하게 말한 후 방사선치료 일정을 설명했다. 아이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유령처럼 가면을 만들어서 머리를 고정시키고 치료에 들어갔다. 2달 정도 방사선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목과 입이 헤져서 죽으로 하루하루를 이어 나갔다. 고달픈 방사선 치료가 끝나자 아이는 한 달 정도 휴학을 했고 깃털처럼 가벼워져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제 11월 말 쯤 다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아이의 알 수 없는 미래가 두렵고 불안하다.

단풍색깔이 너무 고와 눈이 멀듯 속절없이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에 팔려 발 따로 눈 따로… 중앙서울마라톤은 후반으로 무르익어 갔다. 반환점을 돌자 걷는 사람 반, 달리는 사람 반이다. 다리에 쥐가 나서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 걷다 서다를 반복하는 사람, 스타트 지점에서의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자세가 많이 흐트러져 이제는 버거워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앞에 가는 4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를 따라 잡는다. 낯익은 페이스메이커의 얼굴이 반갑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마라톤 클럽의 허만옥 훈련팀장이다. 매력적인 명품코스 남산에서의 인터벌 훈련, 대모산 울트라 산악 훈련, 맨발로 밟았던 청계산의 부드러운 황톳길 등 그녀와 훈련한 뜨거웠던 지난 여름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힘을 외친 후, 그녀를 뒤로 한 채 온 몸으로 마지막 사랑을 태우는 단풍의 열정으로 달린다. 저 멀리 희미하게 30Km라는 숫자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3시간15분8초로 30Km의 고개를 넘는다.

이제 남은 거리 12Km. 지금부터 시작이다."마지막 남은 10Km는 마라톤 주행 거리의 절반과 같다" 는 이야기를 마라톤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마지막 남은 10Km를 어떻게 달리는가에 따라 마라톤 완주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오늘을 위해 주3회 한강을 달렸다. 가장 길게 달렸던 거리가 32.195Km인데 나의 달리기 경험은 이 지점에서 바닥이 났다. 남은 거리는 오로지 정신력과의 싸움이다. 수서역을 지나자 체력이 떨어지고 탄천1교의 오르막이 버겁다. 졸음이 몰려오지만 눈을 감고 달린다. 지금 이 순간, 마라톤 너는 내 운명이다.

드디어 40Km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제 2Km만 달리면 고지가 보인다. 삼전동 사거리를 지나 잠실 주경기장 표지판이 보인다. 조금만 더 뛰면 피니쉬 지점인 잠실종합운동장 메인스타디움인데…. 조금 더 힘을 내서 스피드를 내본다. 저 멀리 잠실 종합운동장 입구로 들어서는 천국의 문이 보이고 주로에는 함성소리가 울려 퍼지고 카메라가 보일 때 마다 인상을 펴고 표정 관리에 들어간다. 드디어 잠실 종합운동 안으로 들어섰다. 메인스타디움을 한 바퀴 돌아 온 힘을 올인 한다. 기록용 전광판이 눈에 보이고 군중들이 나를 응원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내 생애 첫 풀코스인 2007년 중앙서울마라톤의 기록이 4시간36분15초! 전광판의 시계가 숨을 쉬지 않는다. 잠시 후 멈추었던 붉은 숫자가 다시 꿈틀거린다. 살아가면서 몇 번 맞이할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이다.

풀코스를 완주한 기분이 이런 것인가? 태어나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몽롱함, 황홀함, 무아도취, 국어사전에 있는 단어로는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오늘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서 알리와 자라에게는 신발이 세상의 전부이다. 알리는 동생에게 상품으로 신발을 타다 주려고 마라톤대회에 나간다. 운동화를 타려면 3등을 해야 하는데 1등을 해버린 알리의 슬픔처럼 희비가 교차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정신이 아득하다. 마라톤! 당신의 위대함에 눈이 부시다.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현실로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나를 찾아온 불행을 잊기 위해서 매일 밤 혼자서 양재천을 뛰어 다녔다. 개나리와 설유화가 흐드러지게 핀 봄날 양재천을 배회하다가 마라톤 교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마라톤에 대한 기본 훈련을 마치고 마라톤 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올 5월부터 차근차근 중앙서울마라톤을 준비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여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우기로 양재천이 물에 잠겼을 때도 우리 마라톤 클럽 회원들은 미친듯이 양재천을 달렸다. 무리한 연습으로 인해 아킬레스에 염증이 생겨서 병원에 갔는데 마라톤을 시작한지 1년도 안되서 풀코스를 뛴다고 하니까 의사가 미쳤다고 하면서 풀코스는 천천히 뛰고 건강달리기를 권유했지만... 나는 달렸다. 또한 마라톤 클럽 회원들의 결속력과 아낌없는 후원은 큰 힘이 되었다. 반환점을 돌아오는 수서역에서의 마라톤 클럽 회원들의 응원과 격려, 나와 함께 동반주를 하면서 속도 조절, 구간별 시간체크 등으로 성공적인 완주를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우리 마라톤 클럽 공식 몸짱(?)이자 서브쓰리를 꿈꾸는 마라톤의 사부 위경선 님과 마지막 급수지점부터 꿀물을 타가지고 잠실종합운동장 메인스타디움까지 동행을 해 주신 박승곤 님의 후의가 눈물겹다. 두 분 덕분에 오늘 42.195Km와의 행복한 동행에 마침표를 찍었다.

"마라톤의 주행거리는 삶의 긴 여정에 비해 극히 짧은 거리지만 장거리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는 제인 모텐스의 말처럼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긴 여정에 비하면 42.195Km와의 동행은 짧은 거리였다. 42.195Km를 달리면서 아이가 꼭 완치될 수 있다는 희망의 발자국을 남겼다. 마라톤과 인생에서는 평탄한 코스와 언덕 코스가 있는데 지금 언덕에서 인터벌 훈련 중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달리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내 아이가 완치되는 날, 꼭 함께 중앙마라톤 풀코스를 달릴 것을 약속하면서… 내 사랑하는 아이의 긴 이야기를 희망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