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의 감동은 오버페이스다

- 어느 게으른 달림이의 첫 풀코스 완주기


  지난 여름 어느 토요일 오후, 쉬었던 달리기를 다시 하면서 가을에 있을 풀코스대회를 준비했다.

3개월 남짓 남은 시간을 열심히 해 보기로 하였으나 결국 계획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규칙한 출장과 늦은 밤까지 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많아진 점이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2005년 봄 우연히 시작한 달리기이지만 그간 변변한 연습 한 번 없었고, 기본적인 준비가 필요한 풀코스는 아예 엄두를 내지 않았었다. 게으름 탓, 다른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달림이들이 바쁜 일상의 틈 속에서 힘들게 달리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기를 보니, 7월은 8일 나가서 45k를 뛰었고, 8월은 11일 92k, 9월 들어 열흘 달리기에 130k 그리고 10월은 달린 날 9일에 127k가 누적거리였다. 일주일에 고작 두어 번, 학교운동장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포함해서도 운동화 신는 날이 이 수준이었다. 담배와 술자리도 변함없이 여전했다.


  그런 어영부영한 시간을 보내고 10월이 되니 부채의식과 함께 조바심이 났다.

한 달 남은 시간에 일주일만에 무려 100k가 넘는 몰아치기 연습을 하게 된다. 종전 1개월 훈련량에 준하는 무리한 연습이었다, 나름대로의 스피드훈련도 실시했다. 짧은 거리는 꽤 빠른 속도로 주파하는 수준이 되었으나 느닷없이 발에 이상이 생겼다. 발바닥에 바늘로 찌르는 통증이 나타났다. 족저근막염 증상이라고 하니 쉴 수 밖에 없었다. 무리한 훈련은 그에 상응한 결과가 어김없이 나타나며, 신체단련은 벼락치기가 통하는 공부와는 다르게 시간에 따라 단계적인 상승이 필수적임을 실감한다. 풀코스를 다음으로 미루어야 하는 아쉬움은 적잖이 있었으나 한 편으로 홀가분한 심정도 들었다.
 
  아침 저녁으로 야구배트와 골프공으로 발바닥을 마사지하는 보름을 보냈다. 상태가 호전되었다. 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두 번의 편한 달리기를 해 보았다. 무리를 하지 않고 가벼운 기분으로 참가하면 될 것 같았다. 금요일 숙면을 취하고 든든한 아침밥을 먹고 잠실운동장으로 갔다. 보름을 쉬고 나서 그야말로 소풍 삼아, 월 연습량 100키로 내외, 장거리도 없는 턱없이 미비한 상태로 말이다. 완주나 할 수있으려나~.


  11월 4일 아침은 조금 춥기는 하나 달리기에 아주 적합한 청명한 날씨였다.

4시간이내 기록이 없는 C그룹에 자리를 잡는다. 많은 인파 속에서 동호회의 훈련팀장과 이지호님을 반갑게 만나고 기념사진을 찍고 덕담과 함께 힘을 얻는다. 봉사정신과 열정이 남다른 분들이다. 김화배님도 잠시 보이고 힘을 전했다. 출발시간이 다가오고 달림이들의 비장한 표정들을 보니 약간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마음이란 간사해지기 쉬운 모양, 그냥 3시간 30분대로 뛰어 봐? 아니면 5분 30초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와 4시간 페메가 함께 뛰려고 하는 사람들과 각각 그룹이 되어 뭉쳐 있다. 고민스럽다. 하프 이상의 장거리가 없으니 무조건 천천히 가야 하고 킬로미터 당 6분 이내로 뛰면 완주조차 어려울 것이다,는 조언들이 그 유혹을 떨치게 만들었다. 그래~처음 생각대로 완주를 목표로 하자. 이렇게 뛰게 된 것만 해도 어디야~. 컨디션이 좋아져도 4시간 페메보다 앞서지 않기로 마음먹고 차분히 시계버튼을 누른다.


0 ~  5k ; 구간 27'30"  누적 27'30"

  평소 다니는 잘 아는 길이다. 송파구에서 생활한 지 10년 하고도 몇 해가 지났다. 이 년 전, 집 앞에서 본 장엄한 마라톤의 행렬은 너무나 강렬했다. 지금은 중앙마라톤 뿐이지만 그 해는 동아와 경향마라톤도 우리아파트 사거리를 지나는 코스였다. 그 길을 이제야 가게 된다.

  처음 급수대가 있는 강동구청 5k까지 27분 30초, 편한 속도였다.

출발과 함께 몇 걸음 앞에서 달리는 여성 달림이가 있었다. 감색과 연분홍색으로 매치한 가을 색 톤의 복장이 매우 안정한 자세와 함께 눈에 들어왔다. 달리면서 서로 가끔씩 말없는 얼굴을 바라본다. 물을 먹고 다시 사람들 속에서 보조를 맞춘다.


5 ~ 10k ; 구간 27'23"  누적 54'53"

  강동구를 거쳐 다시 송파구, 아이들과 가끔 산책하는 올림픽공원과 선수촌아파트 옆을 지난다. 차량을 막고 대로를 달리는 기분은 해방구의 쾌감 그것과 같다. 발바닥에 미세한 통증이 나타난다. 세심하고 조심스런 착지를 반복하니 불편한 느낌만 있을 뿐 큰 변화가 없어 견딜 만 했다. 몸이 가볍다는 것은 달리기에 있어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스무 살 이후 지금껏 일정한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 달릴 때도 평소와 같이 물을 많이 먹지 않지만, 방이역 10k 급수지점에서 다시 컵을 든다. 완주를 위해서는 천천히 달리는 것만큼 급수 또한 중요하다고 하니 달게 물은 마셨다.


10 ~ 15k ; 구간 28'02"  누적 1:22'55"

  송파동 방향에서 경찰서로 넘어 가는 다리가 보인다. 교각 옆에서 여럿이 함께 소변을 본다.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장에서 예비군복장으로 갈아 입었을 때 즉시, 아무 갈등없이 바로 나타나는 집단 도덕불감증, 나도 공범이 되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일정하게 뛰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같이 달리는 구성원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마치 오래 전부터 같이 운동하는 지인들마냥 사이좋게 간다. 물론 가을 색 여인도 몇 걸음 앞에서 변함없이 가고 있다. 몸이 풀리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덤덤한 상태, 땀이 없다. 너무 천천히 뛰는 것은 아닐까?


  가락시장 사거리 전, 육교아래에 아이들이 나와 있다. 멀리서 첫째와 둘째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고는 큰 소리로 부른다. 막내와 아내는 늦잠을 자는 모양인데, 운동에 관심 많은 남자애들이라 그런지 자기 전에 아빠 달리는 것을 보겠다기에 지나는 예상시간을 말해 주었다. 새파랗게 된 얼굴을 보니 꽤 일찍부터 나와 있었다는 것을 알고 빨리 들어가라고 했다. 똘망똘망 귀여운 내 새끼들~

같은 아파트 사시는 최병긍 형님도 응원차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시장 구간을 지나고 송파구와 강남구의 경계인 탄천교에 접어든다. 다리 우측 아래를 힐끗 본다. 우리숯내의 연습주로, 탄천의 멋진 모습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따사로운 풍경이다. 수서역으로 내려서면 이제부터 산과 들 사이의 일직선 도로가 이어진다.


15 ~ 20k ; 구간 28'04"  누적 1:56'34"

  수서역에서 성남으로 이어지는 길은 온통 가을이다. 건물들로 채워진 도심과는 달리 이 곳은 햇살의 노출만큼 가을이 먼저 온다. 나무들은 봄부터 여름사이를 뜨겁게 살고 다음 해를 위한 마지막 행보를 화려한 빛깔로서 마감한다. 식물학자는, 여름을 보내고 겨울이 오기 전인 이즈음의 식물 내부는 극심한 투쟁을 한다고, 엄청난 변화와 아픔을 겪어야 한다고, 그래야 내년 봄 자신의 생명에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고 했다.


  20키로가 되기 전에 엘리트 선두그룹을 만난다. 한 줄로 이어지는데 모두 흑인이다. 성큼성큼 잘도 간다. 마스터즈 선두가 지나간다. 뒤를 이어 한 두 명씩 일렬종대로 줄이 이어지고 3시간 페메그룹도 무리를 지어 가는 것이 보인다. 반대편도 점점 사람이 많아진다. 입을 벌린 채 내 뱉는 거친 호흡소리가 귀 옆을 스치는 듯했다. 저렇게 열심히 달리는 거다, 마라톤은. 운동은 저래야 한다. 준비없는 난 너무 편히 달리고 있었다.


20 ~ 25k ; 구간 28'52"  누적 2:19'51"

  20k를 지나서도 처음과 같은 걸음, 같은 분위기로 간다. 몸은 편하고 발바닥 통증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속도에 더욱 익숙해지고, 햇살은 달리는 전면 머리 위에서 비스듬히 떨어진다. 그늘을 찾아 가장자리로 뛰는 이들도 더러 보이는데 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쫓아 길 가운데로 기분 좋게 가고있다. 


   그간 하프거리는 몇 번 뛰었으나 쉼 없이 그 이상의 거리를 뛰는 것은 처음이다. 여럿 같이 달리니 편안한 마음이었다. 높은 음 경쾌한 노래소리가 들린다. 급조된 차량무대 위에서 힘차게 연주하는 세 명의 록그룹의 응원은 마라톤에 있어서 백미였다. 출발지점에서 본 3시간 40분 페메가 무리를 이끌고 반대편에서 달리고 있다. 반환점을 돌아서면 바로 25k 지점이라고 했다. 4시간 페메가 지나가고 나도 곧 방향을 돌린다. 나란히 달리는 사람들의 호흡이 거칠어 진다. 같이 달려온 구성원에도 이탈자가 조금씩 생긴다. 출발점으로 다시 가는 거다.


25 ~ 30k ; 구간 28'13"  누적 2:48'04"

  시간은 쏜살같다. 우리는 아직 이렇게 여정 중인데, 고수들은 운동화를 풀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다. 마라톤은 30k 지점부터 힘들고 35k에서 진짜로 시작되는 거라고 하는데, 그런가 내 몸은 아직 가볍다. 속도를 올리고 싶은 마음을 재차 억누르고 30키로 지점까지 같은 걸음으로 갔다. 서비스로 주는 파워젤을 2개나 먹었다. 처음 먹어 보았지만 맛이 괜찮았다. 몸에 좋다고 하면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다. 집에서 밥과 찰떡을 먹고 나섰고, 매 급수대마다 물 마시고 초코파이도 먹고, 이제 젤까지 먹었더니 배가 든든해서 좋았다. 이건 완전 소풍이야~.


30 ~ 35k ; 구간 25'13"  누적 3:13'17"

  먼 거리인데도 수서역의 고층건물이 보일 정도로 길은 일직선이다. 같은 옷차림으로 동반해서 달리는 사람들 쪽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 정도면 얼마에 들어가느냐고, 했더니 4시간 플러스 마이너스 5분이란다. 이제부터는 속도를 올리기로 한다. 후반 상황을 예측하지 못해도 남은 거리가 12키 남짓이라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4시간 페메가 보인다. 서서히 추월해서 앞서고, 이어서 나타난 또 한 무리의 4시간 페메그룹을 경쾌하게 앞질렀다. 조금씩 몸이 데워지면서 기분이 상승하는 것을 느낀다. 결국 30키로 지점을 지나면서 내내 추월하는 달리기가 전개되었고 골인점까지 그렇게 이어졌다. 끝나고 구간기록 25분 13초를 보니 여전히 조심스럽게 달렸다는 생각이 든다.


35 ~ 40k ; 구간 24'08"  누적 3:37'25"

  35키로 지점 지나고 수서역사거리로 들어서는데 북과 쾡과리 소리가 들린다. 반가운 얼굴의 동호인들이다. 멋진 응원이다. 음료와 먹거리가 정성스럽게 마련된 것을 알지만 이미 몸은 충분한 급수와 영양상태였다. 아쉬운마음 들었지만 화이팅의 몸짓을 보내고는 빠르게 지나쳤다. 죄송~.진짜 배도 부르고 수분 넉넉했어요.

  가을 복장의 여인이 앞에 나타났다. 내내 시야에 있다가, 20키로 급수대에서 꽤 여유있는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할 때 먼 발치로 앞서 가는 것을 보고는 35키로 지날 때까지 볼 수 없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화이팅을 전하면서 빠르게 옆을 지났다. 등뒤에서 힘 내세요,잘 하세요,라는 응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첫 대화이자 마지막 만남~.


  탄천 1교로 우회전하기 전까지 은근히 오르막이었다. 경과시간과 주로를 감안하면 이 구간이 최고로 힘들다고 한다. 힘차게 오른다. 숯내유니폼을 입은 분이 가고 있다. 우원석님이다. 큰 소리로 힘을 전하고 다시 앞서 간다. 달리는 맛을 느낀다. 주위 달림이들의 거친 호흡소리가 내겐 멋진 자극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시간은 많이 흘렀고 완주의 의미말고는 특별한 목표는 없었다.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호흡이나 몸이 양호해 더 빨리 달려 보려다 경험으로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갔다.


40 ~ 42,195k ; 구간 11'09"  누적 3:48'34"

  운동장으로 가는 연도에 사람들이 나와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아는 이의 모습을 찾으려는 기대 찬 눈빛을 흥미롭게 보았다. 그대들은 아시는지~ 마라톤은 특별히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어도 행복한 여정이라는, 시작과 끝을 스스로의 몸과 정신이 함께 했었다는 것을.


  메인스타디움을 향한 정문을 통과할 때, 첫 완주의 기쁨이 내게도 전해졌다, 약하고 희미했지만.

전날까지 내내, 출발하고 나서도 한참동안 완주여부를 걱정했지만, 편하게 마칠 수 있어서 기분이 상쾌했다. 아마도 속도를 낮추어 뛴 점이 무리없이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후반에 4분대를 힘들지 않게 뛰어 보았으나 그 속도나 좀 더 빠른 속도로 계속해서 뛰는 것은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이라는 점, 장거리경험이 없어도 천천히 여유있게 뛰면 그 가운데 몸이 알아서 적응된다는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시간 초중반 주자도 대단하지만 그렇다면 2시간대 주자는 얼마나?


키와 몸무게 : 173cm / 58.5 ± 1.5 kg

달리기 이력 : 2년 반, 10키로(41~2분) 및 하프대회 몇 회, 풀코스 없음

풀코스 준비 : 3개월 월평균 9일-110km 거리

착용신발 : 미즈노 준 레이싱화

컨디션 : 감기와 초기 족저근막염, 기분 느긋함


0~  5k     27'30"    27'30"

 ~ 10k     27'23"    54'53"

 ~ 15k     28'02"  1:22'55"

 ~ 20k     28'04"  1:50'59"

 ~ 25k     28'52"  2:19'51"

 ~ 30k     28'13"  2:48'04"

 ~ 35k     25'13"  3:13'17" 

 ~ 40k     24'08"  3:37'25"

 ~42,195k  11'09"  3:48'34"

 

 

 

  나의 첫 풀코스는 이렇게 덤덤하게 끝났다. 아쉬움보다 좋은 경험으로 소중히 기억할 것이다.
벅찬 감동과 희열은 힘든 여정과 노력 끝에 얻는다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거친 숨소리, 터져 버릴 것 같은 심장으로 42.195를 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