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운동화 그리고 소양강처녀
- 2007년 춘천마라톤대회를 마치며

 


1.
봄내의 가을은 아름답습니다. 의암호반의 풍광이 그러하고, 산천을 물들인 곱디 고운 단풍이 그러하고, 주로를 물들인 마라토너들의 물결이 그러합니다. 올해도 나는 춘천마라톤대회가 열리는 종합운동장에 서 있습니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수 많은 달림이들의 운집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관입니다.

출발시간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만 마음은 벌써 의암댐을, 박사마을을, 춘천댐을 달리고 있습니다. 새벽기차를 함께 타고 온 직장동료와 더불어숲 회원들은 어딘 가에서 나처럼 즐거운 상상을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쾌한 기분, 가볍게 몸을 풀며 몸을 데웁니다. 엘리트 선수들을 시작으로 앞선 그룹의 선수들이 출발선을 딛고 힘차게 달려 갑니다. 잠시 후에는 나도 새로운 가을의 전설을 만나러 사람들 속에 내 몸을 던지겠지요. 출발을 기다리다가 지난 여름 숯내마라톤교실에서 함께 달리던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 잠시 악수하며 인사 나누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2.
드디어 출발. 운동장을 빠져 나온 수 많은 사람들이 의암댐을 향해 긴 언덕을 오릅니다. 여럿이 모여 함께 달리는 길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있는 듯합니다. 아무도 밀어주고 당겨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 끄는 것처럼 왠지 모를 힘이 솟아납니다.

 

언덕을 넘어서자 저 멀리 파란풍선이 둥둥 떠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저 풍선과 함께 종합운동장에 들어간다면 3시간 40분 이내에 완주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기대는 내 실력을 감안할 때 상당히 부풀려진 것이기는 합니다. 이미 눈치를 채셨겠지만 멀리 춘천댐이 보이는 어떤 지점에서 나는 파란풍선과 작별해야 했습니다.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풍선을 바라보면서 춘천댐을 지났습니다. 이제 고행의 시작입니다. 지난해 언덕을 넘느라 무척이나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올해는 결코 걷지 않으리라. 내가 힘들게 걷던 이 길을 지난해에도 그러하고, 올해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달리고 있지 않은가!' 언덕을 오르는 길 옆에 숨어 있는 약수터가 눈에 들어 옵니다. 힘 빠진 몸에 한없이 물을 퍼붓던 기억이 스쳐 갑니다.

 

걸어서 언덕을 오르는 것과 달려가면서 오르는 것,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는 것과 그냥 지나치는 것. 돌이켜 보면 그것은 특별한 차이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걷지 않고 언덕길 오르려는 도전을 즐겨 본 것은 기억에 남겠지요. 힘 빠진 몸에 물 퍼붓던 기억처럼 말입니다.

 


3.
언덕을 넘었습니다. 수고한 이들을 격려하듯 바나나와 음료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급수대를 떠나면서 나는 바나나 두 개를 집어 들었습니다. 나보다 힘들어 하는 누군가에게, 나를 위해 응원하는 누군가에게 건네질 특별한 선물입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길가에서 응원하고 있는 군인아저씨들을 봤습니다. 내가 선물할 바나나의 주인공들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이등병을 찾아 바나나를 건넸습니다. 그들의 응원이 나에게 힘이 됐던 것처럼, 바나나 한 개가 그에게도 힘이 됐기를 기대합니다.

 

문득 온리하프님의 마라톤소설 '찢어진 운동화'가 생각났습니다. 홀로 힘들게 달리고 있는 '성경'을 위해 주로를 거슬러 달려오는 '동준'의 발자국 소리가 귓전을 맴 돕니다. 어느 가을운동회가 열리는 학교 운동장.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있는 '호상'을 위해 자기 신발을 벗어 줬던 '동준'의 우정이 생각납니다.

 

'나를 위해 거꾸로 달려올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는 누군가를 위해 거꾸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인가?
나의 찢어진 운동화를 보고 자기의 신발을 벗어 줄 친구가 있는가?
나는 누군가를 위해 내 신발을 벗어 줄 수 있는 사람인가?'

 

수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4.
소양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넙니다. 해 저문 소양강을 거니는 열여덟 딸기같은 소양강처녀 대신 힘찬 응원을 보태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또 다시 나도 모르는 어딘 가에서 힘이 솟아 오름을 느낍니다. 이제 종합운동장도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학창시절 수없이 오가던 버스터미널을 지나면서 내 몸에 마지막 힘을 보탭니다.

 

아! 종합운동장이 저기 보입니다. 길 옆에 늘어선 수 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응원의 박수가, 응원의 함성이 들립니다. 누군가의 추억을 담아 내려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립니다. 운동장 트랙을 돌아 출발아치를 향해 달려갑니다. 출발선 아래 깔린 매트에서 완주를 축하하는 기계음이 들립니다. 먼저 들어온 몇 분과 인사를 나누며 운동장을 나섭니다.

 

가을의 전설 춘천마라톤은 올해에도 특별한 추억을 남기며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갑니다. 올해에도 나는 사람 없는 호젓한 의암호반 대신 사람 많은 복잡한 의암호반을, 단풍잎 대신 종이컵을 밟으면서 달렸습니다. 내년에도 나는 입상메달 대신 완주메달을 목에 걸고, 선도차의 주로안내 대신 회수차의 승차권유를 받으면서 달리게 되더라도, 행복한 추억을 만나러 가는 새벽기차 어느 좌석에서 졸고 있을 겁니다.

 

2007.10.28.

 

글벗과 길벗 그리고 -
신선한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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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 그와 나
- 서브5 주자의 완주예찬(完走禮讚)


그가 달리면 질주라고 부른다.
내가 달리면 펀런이라 부른다.


그는 선도차의 주로인도를 받으면서 달린다.
나는 회수차의 승차권유를 받으면서 달린다.


그는 달리는 내내 카메라의 시선을 받으면서 달린다.
나는 달리는 내내 카메라의 시선을 찾으면서 달린다.


그는 사람없는 호젓한 의암호반을 달린다.
나는 사람많은 복잡한 의암호반을 달린다.


그는 의암호의 단풍잎을 밟으며 달린다.
나는 길거리의 종이컵을 밟으며 달린다.


그는 길거리의 응원을 받으며 달린다.
나는 길거리의 동정을 받으며 달린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뒤로 밀려남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서감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는 최고기록에 도전하며 달린다.
나는 제한시간에 쫓기면서 달린다.


그는 서브3가 자랑스럽다.
나는 서브5가 자랑스럽다.


그는 입상을 했다.
나는 완주를 했다.


그는 입상메달을 목에 건다.
나는 완주메달을 목에 건다.


그는 새로운 기록에 목마르다.
나는 즐거운 완주에 목마르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2007년 새로운 가을의 전설을 꿈꾼다.



2006.10.31.

춘천마라톤, 완주하신 모든 분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 드리며 -

신선한새벽입니다.


* 그는 특정 인물이 아닙니다.
* 도전은 이미 빛나는 성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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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쓴 후기의 끝자락에 있는 글은
지난해에 쓴 후기의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아직 저물지 않은 추억의 현현을
나를 기억하는 분들과 공감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해 쓴 잡문을 뒤늦게 
이 곳에 옮겨 쓴 까닭도 그러합니다.